코드에서 전기로, 패러다임의 전환
인공지능(AI) 경쟁의 판이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은 최근 여러 자리에서 AI 패권 경쟁이 이제 ‘코딩’이 아닌 ‘전기’의 전쟁으로 이동했다고 진단했습니다. 지난 20년간 소프트웨어가 세상을 지배한다는 믿음과는 달리, 현실의 AI는 막대한 전력을 먹는 거대한 장치 산업의 양상을 띠고 있다는 설명입니다. 즉, 희소한 자원은 이제 정교한 코드가 아니라 GPU, 메모리, 그리고 이를 돌릴 전력과 송전망 같은 물리적 인프라라는 주장이죠. AI 모델은 빠르게 복제될 수 있지만, 발전소와 반도체 공장은 하루아침에 만들 수 없습니다. 이로 인해 경쟁의 초점이 소프트웨어 역량에서 하드웨어와 에너지 공급의 ‘체급 경쟁’으로 재편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한국의 딜레마, 세계 최고 기술과 전력 공급의 괴리
문제는 한국이 가진 강점과 약점이 명확하게 맞물린다는 점입니다. 김 실장은 세계 최고 수준의 메모리 생산 능력, 특히 HBM(고대역폭 메모리) 기술을 보유하고 있음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정작 그 기술이 만들어내는 핵심 부품이 해외 데이터센터로 수출되는 동안, 국내에는 이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AI 연산 클러스터가 충분히 구축되지 못할 수 있다고 우려합니다. 마치 최고급 주방도구를 만들었는데, 정작 우리 주방의 전기 콘센트가 부족해 제대로 가동하지 못하는 상황에 비유할 수 있죠. 현재 한국에 전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은 아니지만, AI 데이터센터 한 곳이 중소 도시 전체의 전력을 소비하는 시대에, 요구되는 규모와 속도로 안정적인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인프라가 준비되어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이는 단순한 전력량 문제를 넘어 송배전망, 입지 제한, 느린 인허가 절차 등 전반적인 시스템의 개혁이 필요함을 시사합니다.
해법은 '지산지소'와 전력망의 안보 인프라화
이런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핵심 해법으로 ‘지산지소(地産地消)’ 원칙과 전력망의 위상 격상이 제시됩니다. 지산지소는 전력을 생산한 지역에서 소비하는 구조를 말하는데, 김 실장은 여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전력 생산 지역이 산업의 혜택을 함께 누를 수 있도록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원전이나 재생에너지 단지가 있는 지역에 AI 데이터센터를 유치해 송전 부담과 사회적 갈등을 줄이면서 지역 경제에도 기여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전력망을 단순한 사회간접자본이 아니라 국가 안보 차원의 핵심 인프라로 재정의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옵니다. 이를 위해 국가 재정의 적극적인 투입, 민관 협력의 제도화, 안정적 운영을 담보할 거버넌스 구축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현재 정부가 추진 중인 제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과 전력산업 구조 개혁은, 한국이 AI 시대에 ‘지능 수입국’으로 남을지 ‘지능 생산국’으로 도약할지를 가르는 중요한 분기점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