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과 보존,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
종묘 맞은편에 초고층 빌딩이 들어서는 것을 둘러싼 논란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서울시가 추진 중인 세운4구역 재개발 사업은 최대 40층에 달하는 고층 건물을 계획하고 있는데요, 문제는 이 건물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종묘에서 불과 170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다는 점입니다. 세운4구역 재개발은 단순한 도시 재생을 넘어, 세계유산 보존이라는 중차대한 문제와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국가유산청이 본격적으로 나섰습니다. 허민 국가유산청장은 종묘 주변 500m 이내에서 이루어지는 대규모 건축 공사에 대해 국가유산청장의 사전 허가를 받도록 의무화하는 내용의 세계유산법 시행령 개정안을 추진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이 개정안은 이달 중 재입법 예고를 거쳐 내년 3월 공포될 예정입니다. 기존 규제 권역이 100m였던 것을 500m로 크게 확대하는 이 조치는, 소음, 진동, 대기오염, 심지어 빛과 열까지 포함한 다양한 환경적 영향이 문화유산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을 관리하겠다는 의지입니다.
보존론자 vs 개발론자, 팽팽한 줄다리기
이번 논란의 핵심은 '세운 도심재개발'의 상징적 의미와 충돌하고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세운상가 일대의 재개발을 강북 지역 부활의 신호탄이자 새로운 도시 모델로 평가합니다. 1960년대 한국 경제 성장의 상징이었다가 쇠퇴한 이 지역에 복합 문화·상업·주거 공간을 조성해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계획인데요, 여기에 청년 창업 지원 공간과 K-팝 관련 시설 유치까지 더해 관광 명소로의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반면, 문화유산 보존 측에서는 강력한 우려를 표명합니다. 종묘는 조선 왕조의 왕실 제사 공간으로, 그 건축적·정신적 가치는 단순한 오래된 건물을 넘어선다고 강조합니다. 초고층 건물로 인한 경관 훼손은 물론, 장기적인 공사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진동이 지하 유구나 건물 본체에 미칠 미세한 영향까지도 염려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국가유산청은 이러한 우려를 바탕으로, 권역 밖의 개발이라도 문화유산에 영향을 미칠 경우 허가를 받도록 하는 포괄적 고시 제정도 준비 중입니다.
양측의 입장을 조정하기 위한 움직임도 시작되었습니다. 국가유산청은 지난 5일 서울시, 문화체육관광부와 함께 국장급 예비 조정회의를 개최했습니다. 아직 유산영향평가의 실시 여부 등 구체적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공식적인 협의 채널이 마련된 것은 의미 있는 진전입니다. 허 청장은 필요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서울시장이 참여하는 상급 회의나 시민 간담회 개최도 검토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법적 장치 마련과 국제적 관심
이번 사태는 우리나라의 세계유산 보존 시스템이 아직 완벽하지 않음을 드러낸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에 국가유산청은 법적 틀을 보강하는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세계유산법 시행령 개정과 함께, 각 세계유산별로 주변 개발에 대한 영향평가 기준을 세분화해 운영할 계획입니다. 이는 향후 다른 세계유산에서 비슷한 논란이 발생하는 것을 미리 방지하기 위한 선제적 조치입니다.
국제사회의 시선도 만만치 않습니다. 국가유산청은 최근 유네스코 신임 사무총장 및 세계유산센터장과의 면담에서 이번 논란과 한국 정부의 대응 상황을 공유했습니다. 내년 부산에서 개최 예정인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어야 하는 주최국으로서, 세계유산 보호에 대한 확고한 입장을 보여줘야 하는 부담도 있습니다. 이번 사안은 단순한 도시 개발 문제를 넘어, 한국의 문화유산 관리 역량에 대한 국제적 평가와 직결된 문제가 되었습니다.
합의점을 찾아가는 여정
갈등의 해법은 여전히 멀어 보이지만, 몇 가지 가능한 접근법이 논의되고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철저한 유산영향평가의 시행입니다. 공사가 종묘에 미치는 모든 가능한 영향—구조적 안전, 시각적 경관, 소음·진동 등—을 과학적으로 조사하고 평가하는 것이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평가 결과에 따라 건물의 높이를 조정하거나, 디자인을 변경하는 등의 조치가 뒤따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방안은 개발의 내용 자체를 재점검하는 것입니다. 세운4구역이 단순한 고층 오피스텔이 아닌, 종묘의 역사적 가치를 조명하고 보완할 수 있는 문화 복합 공간으로 설계될 수는 없을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종묘의 역사와 조선 시대 건축을 소개하는 전시 공간이나 연구 시설을 포함하는 식이죠. 궁극적으로는 도시의 발전과 문화유산의 보존이 상생할 수 있는 ‘제3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번 논란은 우리 사회가 직면한 보편적 딜레마를 잘 보여줍니다. 낙후된 도심을 되살리려는 개발의 필요성과, 후손에게 물려줄 소중한 유산을 지키려는 보존의 가치가 충돌하는 순간입니다. 법과 제도가 마련되고, 이해당사자 간의 대화가 지속되는 가운데, 이 복잡한 퍼즐의 합리적인 해법이 나올 수 있을지 주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