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전철, 중국이 답습하나
AI 메모리 초호황이 한국 반도체 업계에 뜨거운 바람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바람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를 두고 시장의 시선은 점점 조심스러워지고 있는데요. 일본 반도체가 기술 독점의 전성기를 누리다 미국의 견제와 시장 변화로 몰락한 전철을 중국의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가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CXMT는 2016년 창업 후 10년간의 적자 끝에 지난해 첫 흑자를 기록했습니다. 올해는 매출이 전년 대비 7배나 급증하며 상하이 증시 시가총액 1위에 올랐는데요. 이 모습은 과거 삼성전자가 누적 적자를 딛고 일본 기업들을 추월하던 과정과 매우 닮아 있습니다. 당시 일본은 고품질·고가격 전략에 집중한 사이, 삼성전자와 TSMC가 저가격·적정품질의 틈새를 공략하며 급성장했죠. 지금은 AI 메모리 가격 폭등기를 타고 성장한 CXMT가 한국 기업들을 위협하는 구도로 바뀌었습니다. 현재 점유율이 8%에 불과하지만 내년이면 마이크론을 추월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습니다.
혁신으로 주도권 지키려는 한국
물론 한국 기업들이 가만히 있는 건 아닙니다. 삼성전자는 데이터 병목 현상을 해소하고 전력 효율을 극대화한 차세대 3차원 메모리 아키텍처를 공개하며 기술 주도권 사수에 나섰습니다. 이 기술은 기존 HBM5와 비교해 GPU당 성능을 최대 8배, 전력 대비 성능은 3배까지 끌어올리면서 발열은 절반 이상 줄일 수 있는 수준입니다. 가속기와 메모리 간 데이터 이동 거리를 최소화한 것이 핵심인데요, 이를 통해 AI 반도체의 성능 한계를 뛰어넘겠다는 계획입니다.
프랑스 욜그룹은 한국 정부의 웨이퍼 생산량 확대 계획과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공격적 투자를 근거로 한국이 2031년까지 메모리 최강국 지위를 유지할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특히 AI가 학습 중심에서 추론 중심인 이른바 AI 2.0 단계로 진화하면서 메모리 수요가 급증하고 있고, 제품 개발 주기가 기존 18개월에서 12개월로 단축되는 등 시장 변화가 극심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민첩하게 대처할 수 있는 한국 기업들의 강점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겁니다. 월가에서는 SK하이닉스의 ADR이 저평가되었다며 매수 의견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지정학적 리스크가 남긴 과제
반면 시장에는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습니다. 올해 상반기 외국인 투자자들의 삼성전자·SK하이닉스 순매도액이 130조 원에 달했고, 7월까지 사이드카가 68회나 발동될 정도로 금융 시장 변동성이 컸습니다. 이는 단순한 차익 실현을 넘어 한국판 플라자 합의나 미·한 반도체 협정 같은 지정학적 리스크에 대한 선제적 대응이라는 해석이 나옵니다. 미중 갈등 속에서 한국이 반도체 패권을 지키면서도 대외 압력을 관리해야 하는 숙제가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또한 구글 등 대형 클라우드 기업들이 자체 ASIC을 도입하면서 엔비디아의 HBM 독점 체제는 완화되고 있고, CXMT도 10나노급 3세대 공정 수준까지 기술력을 올려 추격 속도를 높이고 있습니다. 한국이 메모리 패권을 지키려면 기술 혁신만큼이나 불확실한 대외 환경에 대한 세심한 전략도 필요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