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반구 에너지 지도를 바꾸는 거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베네수엘라와의 대규모 석유 거래 합의를 발표하며 서반구 에너지 패권 장악에 시동을 걸었습니다. 이번 합의로 미국은 베네수엘라 미개발 유전 17개에서 생산되는 원유의 55%를 확보하게 되는데요. 해당 유전의 추정 매장량은 650억 배럴에 달해 베네수엘라 전체 매장량의 5분의 1 규모입니다.
이번 거래의 가장 큰 배경은 44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진 미국의 전략비축유를 채우려는 목적입니다. 현재 미국 비축유는 약 2억 9천만 배럴로 저장 가능 용량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상황인데요. 트럼프 대통령은 이 원유를 활용해 비축고를 다시 채우고 동시에 중국과 러시아의 서반구 영향력을 차단하는 이른바 돈로 독트린을 확대하려 합니다. 쉽게 말해 에너지 자원을 지정학적 지렛대로 삼아 미국 우선주의를 강화하려는 셈입니다.
국방부가 나선 이례적인 투자 구조
이번 사업에서 눈에 띄는 점은 민간 기업 대신 미국 국방부가 직접 투자자로 참여했다는 사실입니다. 엑손모빌, 코노코필립스 등 대형 에너지 기업들이 치안 불안과 낙후된 인프라를 이유로 투자를 꺼리자 트럼프 행정부는 국방부 전략자본국을 동원해 페니 워런트 방식으로 자금을 조달했습니다. 이를 통해 미국은 NABEP 지분 35%와 생산 원유 20%의 원가 우선 구매권을 확보했습니다.
사업의 핵심 인물은 베네수엘라 2위 석유 기업 NABEP를 이끄는 알레한드로 베탕쿠르입니다. 그는 과거 우고 차베스 정권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온 인물로 횡령과 자금 세탁 의혹을 받아온 이력이 있는데요. 미국 정부가 이런 인물과 손을 잡고 직접 자금을 댔다는 점에서 논란은 피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당연히 미국 내에서도 민간 석유 기업들이 정부가 밀어주는 거대 경쟁자에게 밀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습니다.
헌법 논란과 요원한 실효성
거래의 실효성을 두고도 여러 지적이 제기됩니다. 우선 베네수엘라의 낙후된 석유 기반 시설을 복구하는 데 최소 7년에서 10년이 걸릴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옵니다. 당장 유가 인하나 비축유 충전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겁니다. 또한 인프라 투자에 필요한 수십억 달러의 자금 조달 주체도 명확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법적 정치적 리스크도 상존합니다. 베네수엘라 헌법은 석유 매장물의 외국 매각을 금지하고 있는데 이번 합의는 이와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계약 기간을 두고도 트럼프 대통령은 100년이라고 했고 로드리게스 임시 대통령은 25년이라고 해서 양측 설명이 엇갈리고 있죠. 델시 로드리게스가 선출된 대통령이 아니라는 점에서 향후 정권이 바뀌면 계약이 뒤집힐 가능성도 크게 남아 있습니다.
베네수엘라 내부에서는 이번 계약을 주권 포기이자 새로운 식민주의로 규정하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습니다. 에너지 패권을 둘러싼 거대한 판세가 움직이고 있지만 거기에는 헌법 위반이나 정경유착 의혹, 그리고 요원한 실현 가능성이라는 복잡한 딜레마가 함께 얽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