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르게 성장하는 시장, 느려진 한국의 발걸음
AI 신약 개발 시장이 전 세계적으로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연평균 29.9%의 높은 성장률을 보이며, 2029년에는 10조 원이 넘는 규모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는 거대한 시장이죠. 미국과 유럽은 물론 중국까지 적극적인 정책과 투자로 이 분야를 선점하기 위해 총력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글로벌 흐름 속에서 한국의 위치는 다소 불안해 보입니다. 양적, 질적 지표 모두에서 선진국 대비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는 분석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죠.
실제로 연구 성과를 보여주는 논문 발표 건수에서 한국은 6위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중국은 이미 미국을 추월했고, 질적 수준을 나타내는 RCR 지표에서도 한국은 캐나다, 영국에 이어 5위에 그칩니다. 특허 출원도 해외 진출로 이어지지 못하고 국내에 국한되는 경우가 많아, 기술 경쟁력을 글로벌 시장에서 검증받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기업들은 뛰는데, 발목을 잡는 장애물들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들의 노력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 기업들이 자체 AI 플랫폼을 구축해 신약 후보물질을 발굴하는 데 매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 기업은 ‘제이웨이브’ 플랫폼으로 유효 약물 탐색부터 선도물질 최적화까지 전주기 개발을, 다른 기업은 ‘데이지’ 시스템으로 화합물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하는 등 각자의 방식으로 AI 기술을 접목하고 있죠. 문제는 이러한 노력이 기술력과 성과로 직결되기까지 가로막는 장벽이 너무 높다는 점입니다.
가장 큰 애로사항은 데이터 활용에 대한 제약입니다. AI가 신약을 개발하려면 대규모의 임상 데이터와 유전체 데이터가 필수적인 연료인데, 국내에서는 가명정보 활용에 대한 규제가 실질적인 연구 개발을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기업들은 필요한 데이터에 접근하기조차 힘든 상황에 놓여 있죠. 이에 따라 데이터 활용을 위한 ‘면책특례제도’ 도입이나 ‘데이터 안심구역’ 내 규제 샌드박스 확대 같은 환경 개선 요구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규제의 불확실성과 부족한 융합 인재
데이터 문제 못지않게 큰 장애물은 규제의 불확실성입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 임상시험계획을 제출할 때, AI가 도출한 결과의 신뢰성을 어떻게 입증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가이드라인이 마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AI 모델이 어떤 데이터로 학습했고, 어떻게 결과를 냈는지 검증할 기준이 없다 보니, 기업들은 개발 후기 단계로 나아가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데이터 출처부터 모델 설계, 성능 평가, 재현성 검증 방법까지 체계적으로 정리된 'GMLP(Good Machine Learning Practice)' 가이드라인 마련이 시급한 이유입니다.
여기에 더해 AI 전문가와 바이오 전문가 간의 소통 부재도 해결해야 할 근본적인 과제로 꼽힙니다. 두 분야의 전문가들이 서로 다른 학문적 언어를 사용하다 보니 협업이 원활하지 않습니다. AI는 알고리즘을, 바이오는 생명 현상을 논하는데, 이 둘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융합형 인재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의대, 약대, 생명과학대 교육과정에 AI와 데이터 과학을 필수로 포함시키고, AI 대학원에 바이오 특화 트랙을 만드는 등 인재 양성 시스템 자체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한 종합 처방이 필요할 때
한국바이오협회를 비롯한 업계는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해 다각적인 정책적 지원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R&D 자금을 지원하는 것을 넘어, 데이터 표준화와 규제 혁신, 그리고 중장기적인 정책 트랙을 신설해 R&D에서 사업화까지 연결하는 통합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주장입니다. AI를 단순한 도구가 아닌 신약 개발의 핵심 인프라로 인식하고, 이에 맞는 국가적 전략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죠.
앞으로의 관건은 이렇게 제기된 문제들—데이터, 규제, 인재—을 어떻게 하나의 시스템으로 묶어 해결책을 마련하느냐에 있을 겁니다.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으려면, 분절된 지원 정책을 넘어 AI 신약 개발의 전 주기를 아우르는 거버넌스를 구축하는 종합적인 접근이 필요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