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상처를 건드린 결정
국가보훈부가 내린 한 결정이 제주도를 중심으로 정치권과 시민사회를 뜨겁게 달아오르게 하고 있습니다. 제주 4·3 사건 당시 강경 진압을 주도한 박진경 대령이 국가유공자로 등록된 것입니다. 보훈부는 유족의 무공훈장 등록 신청에 따라 절차를 거쳐 승인했다고 설명했지만, 이 결정은 과거사에 대한 상반된 기억과 평가가 여전히 첨예하게 대립하는 한국 사회의 민감한 고리를 건드렸습니다.
권오을 국가보훈부 장관은 논란이 확산되자 12월 11일 긴급히 제주도를 방문했습니다. 4·3평화공원을 참배하고 희생자 유족회를 만나 사과의 뜻을 전했죠. 장관은 "희생자와 유족들에게 국가보훈부로서 송구스러운 마음을 전한다"며 "아픔을 치유하지 못하고 오히려 상처를 더 냈다"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과와 동시에 던진 말 한마디가 논란을 더욱 가열시켰습니다. 현행 법령상 무공훈장이 취소되지 않는 한 국가유공자 등록을 취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절차의 정당성 vs. 역사적 정당성
보훈부의 입장은 분명합니다. 박진경 대령은 1950년 전사자로서 을지무공훈장을 추서받았고, 유족이 정해진 절차에 따라 국가유공자 등록을 신청했습니다. 서울보훈지청은 훈장 발급 심사와 범죄경력 조회를 거쳐 등록을 승인했죠. 형식적인 절차만 놓고 보면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문제는 그 절차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아픈 상처 중 하나인 제주 4·3 사건의 맥락을 전혀 고려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박진경 대령은 1948년 제주 9연대장으로 부임한 지 한 달여 만에 암살당한 인물입니다. 그는 당시 도민에 대한 강경 진압 작전을 지휘했고, '제주도민 30만 명 희생도 무방하다'는 발언으로 악명이 높습니다. 이런 인물에게 '대한민국의 오늘은 국가유공자의 공헌과 희생 위에 이룩된 것'이라는 문구가 담긴 국가유공증서가 발급되자, 제주 지역의 반발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습니다. 오영훈 제주지사는 권오을 장관과의 면담에서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 내용만 확인했어도 등록은 보류되었을 것"이라고 지적하며 신속한 제도 보완과 등록 취소를 촉구했습니다.
확산되는 정치적 반발과 제도 개정 움직임
보훈부의 사과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의 비판은 거세집니다. 더불어민주당 제주도의원들은 이 결정을 "역사적 퇴행"이자 "12·12 군사반란과 다름없는 폭거"라고 규탄하며 등록 취소를 촉구했습니다. 정의당 제주도당은 국가 폭력의 가해자를 유공자로 인정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고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이런 반응은 단순한 행정 실수 차원을 넘어, 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유공'의 기준과 역사 인식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한편, 국회에서는 논란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입법 움직임이 시작됐습니다. 박찬대 의원은 공적심사위원회를 설치하고 회의록을 공개하도록 하는 내용의 상훈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습니다. 이 개정안은 박진경 대령 사례처럼 자의적인 유공자 인정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심사 과정의 전문성과 투명성을 높이기 위한 조치입니다. 과거 친일 행적이나 국가폭력 논란으로 독립유공자 서훈이 취소된 사례를 들며, 박진경 대령의 경우도 마찬가지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남은 과제: 제도의 틀과 역사 화해의 길
현재 상황은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한쪽에는 법과 제도에 따라 처리된 행정 절차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그 절차가 무시한 깊은 역사적 상처와 도민의 정서가 있습니다. 보훈부는 입법을 통한 해결이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구체적인 로드맵은 아직 제시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 논란은 국가가 과거의 인물을 평가할 때, 공식적인 훈장 하나만으로 그 생애를 단정 지을 수 있는지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는 사건입니다.
제주도는 이 문제에 대한 당장의 대응으로, 박진경 대령의 행적을 알리는 안내판을 4·3 추모비 옆에 설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는 역사적 사실을 알려 향후 유사한 왜곡을 방지하겠다는 의지입니다. 논란의 해법은 쉽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제주 4·3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중대한 사건을 둘러싼 기억과 평가가 아직 결론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번 사태는 단순한 행정 절차의 오류를 넘어, 우리 사회가 아직 치유하지 못한 상처와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지에 대한 어려운 숙제를 다시 한번 꺼내놓은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