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초로 끝난 금메달 꿈
시속 130km가 넘는 속도로 설원을 가르던 그녀의 활강이 13초 만에 멈췄습니다.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알파인 스키 여자 활강 결승전에서 미국의 스타 선수 린지 본(41)이 출발 직후 두 번째 곡선 구간에서 균형을 잃고 기문에 부딪혀 추락했습니다.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눈 위를 굴러내려가는 모습이 생중계됐고, 의료진의 응급 처치 후 닥터 헬기로 이송되면서 경기는 20분간 중단되었습니다. 이미 왼쪽 무릎 십자인대가 완전 파열된 상태에서 무릎 보호대만을 믿고 올림픽 출전을 강행했던 그의 도전은 처참한 결말을 맞이했죠.
사고는 지난달 30일 스위스 월드컵에서 같은 왼쪽 무릎 십자인대 부상을 입은 지 불과 9일 만에 발생했습니다. 그럼에도 본은 “무릎이 붓지 않았고, 보호대를 착용하면 경기가 가능하다”며 올림픽 출전 의사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고 전날 진행된 연습 주행에서 전체 3위를 기록하며 메달 가능성까지 보여주었던 터라, 팬들과 동료 선수들의 기대는 컸습니다. 하지만 결승전에서 보여준 것은 짧았지만 비극적인 13초의 비행이었습니다.
인공관절과 파열된 인대를 이겨낸 5년
린지 본의 이번 올림픽 도전은 단순한 복귀가 아니었습니다. 2010년 밴쿠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2018년 평창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그는 2019년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2024년, 오른쪽 무릎에 티타늄 인공관절을 삽입하는 대수술을 받고 5년 만에 설원으로 돌아왔죠. 41세의 나이로 현역에 복귀해 월드컵에서 두 차례 우승을 거머쥐며 보여준 기량은 ‘기적’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닐 정도였습니다. 이번 시즌 월드컵에서만 2승 2준우승을 기록하며, 그는 알파인 스키 동계올림픽 최고령 메달리스트라는 기록에 도전할 준비를 마쳤다고 여겨졌습니다.
문제는 그의 몸 상태였습니다. 오른쪽 무릎은 이미 인공관절이 들어간 상태였고, 이번 시즌 내내 유지해오던 왼쪽 무릎의 십자인대마저 올림픽 직전 월드컵에서 파열되고 말았죠. 전문가들은 이런 상태에서 초고속 활강 경기를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수차례 지적했습니다. 알파인 스키 활강은 시속 130km 이상의 속도에 급경사와 큰 점프가 요구되는, 가장 위험한 동계 스포츠 중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그의 선택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마지막 올림픽이다”라는 일념으로 무대에 섰죠.
투지와 무모함 사이, 남겨진 질문들
코르티나담페초는 린지 본에게 특별한 곳입니다. 이곳에서 월드컵 첫 승을 포함해 통산 12번의 우승을 거두었고, 2016년에는 여자 활강 월드컵 최다 우승 기록을 세운 무대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곳에서의 마지막 올림픽 출전은 그에게 더없이 의미 있는 도전이었을 겁니다. 사고 직후, 금메달을 차지한 동료 선수 브리지 존슨을 비롯해 많은 선수들과 팬들이 그의 부상을 애도했고, 대회 아나운서는 그를 ‘코르티나의 여왕’이라고 부르며 경의를 표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스포츠 현장에서 선수의 안전과 의지 사이의 고질적인 딜레마를 다시 한번 부각시켰습니다. 국제스키연맹(FIS) 요한 엘리아슈 회장은 그의 도전 정신을 높이 평가하며 비판하는 이들에게 일침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반면, 부상이 명백한 상태에서의 출전 강행이 과연 올바른 선택이었는지에 대한 의문도 동시에 제기되고 있습니다. 선수 개인의 영광과 도전 정신을 존중해야 하는가, 아니면 신체적 위험을 감수하도록 내버려둬서는 안 되는가 하는 문제죠.
린지 본은 헬기로 이송된 후 정밀 검사를 받았으며, 정확한 부상 정도는 아직 공식 발표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목 부위와 경골 근위부의 추가 골절 가능성이 제기되며, 그의 선수 생활 지속 여부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그의 올림픽 도전은 동화 같은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았지만, 나이와 부상을 딛고 최정상에 다시 오르려 했던 한 선수의 투지와 집념이 남긴 깊은 여운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의 스키가 멈춘 설원 위에는, 승패를 넘어서는 스포츠 정신의 무게가 남아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