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위 문턱을 넘은 초당적 합의
국회 대미투자특별위원회가 9일 ‘한미 전략적 투자 관리를 위한 특별법안’을 여야 만장일치로 의결했습니다. 약 3500억 달러(한화 약 470조 원) 규모의 대미 투자를 실행하기 위한 법적 토대가 마련된 거죠. 이 법안은 오는 12일 본회의에 상정돼 통과될 것으로 보이며, 지난해 11월 체결된 한미 업무협약(MOU)의 본격적인 이행을 앞두고 있습니다. 당초 여야 간 정치적 마찰로 파행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최근 대외 경제 환경의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초당적 협력이 이루어진 겁니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한국의 무역 합의 이행 지연을 이유로 관세 인상을 재차 예고한 점이 법안 처리에 속도를 낸 요인으로 분석됩니다. 경제계를 포함한 여러 이해관계자들은 이번 합의가 한미 간 통상 마찰을 완화하고 예측 가능한 교역 환경을 조성하는 데 의미가 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공사 설립과 ‘2조 원’의 타협
법안의 가장 구체적 성과는 ‘한미전략투자공사’ 설립입니다. 정부가 전액 출자하는 자본금 2조 원 규모로 출범할 이 공사는 반도체, 조선 등 전략 산업 분야의 대미 투자 사업을 총괄 관리하게 됩니다. 흥미로운 건 자본금 규모에 담긴 정치적 타협이에요. 여당이 처음 제안한 3조~5조 원에서 2조 원으로 축소된 건, 기업 출연금 조항이 삭제되면서 재원 조달 방식을 전면 재검토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기업들의 강한 반발로 ‘기업 출연금’ 조항이 법안에서 완전히 제외되었죠. 대신 외환보유액 운용 수익 등 정부 주도의 재원 조달 방안이 채택됐습니다. 공사의 운영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구조적 조정도 이뤄졌습니다. 이사 정원은 5명에서 3명으로, 직원 수는 50명 이내로 대폭 축소됐고, 사장과 이사의 자격 요건을 금융이나 전략 산업 분야 10년 이상 경력자로 제한해 ‘낙하산 인사’ 논란을 차단하려 했습니다.
투명성과 효율성의 균형도 중요하게 고려됐습니다. 모든 투자 건에 대해 국회의 사전 동의를 받도록 하면 신속한 결정이 어려울 수 있다는 판단에서, 정부의 사전 보고를 원칙으로 하고 국가 안보 등 전략적 투자에 한해 국회 동의를 받도록 했습니다. 업무 자료는 원칙적 공개를 전제하되, 국가 안보나 기업 비밀에 해당할 경우 비공개할 수 있는 탄력적 장치도 마련됐습니다.
경제 안보 시대의 새로운 도구
이번 특별법 통과는 단순한 투자 지원법을 넘어,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경제 안보 시대에 대응하는 한국의 새로운 정책 도구로 해석됩니다. 법안에는 투자 리스크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공사 이사회 내에 ‘리스크관리위원회’를 두도록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 위원회는 투자 후보 사업의 상업적 타당성부터 전략적, 법적 위험요인까지 다각도로 검토하는 다층적 안전장치 역할을 하게 됩니다.
경제 6단체를 비롯한 경제계는 공동 성명을 통해 이번 법안 통과를 환영하며, 관세 등 통상 리스크를 완화하고 기업의 안정적 글로벌 공급망 확보에 기여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반면, 일부 진보 정당과 시민단체는 기자회견을 통해 법안이 국가 주권에 대한 우려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며 반대 입장을 표명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법안 자체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변화하는 글로벌 질서에 대응해 정부와 국회가 제도적 대응을 서둘렀다는 점에서는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제 남은 과제는 실행입니다. 12일 본회의 통과 후 한미전략투자공사가 조속히 설립되어 실질적인 투자 사업을 가동해야 합니다. 미국 행정부와의 협의를 통해 투자처를 구체화하고, 국내 기업들의 현지 진출을 지원하는 동시에 과도한 부담이 가지 않도록 세심하게 챙겨야 할 것입니다. 이 법이 한미 경제 동맹을 강화하는 든든한 기반이 될지, 아니면 새로운 논란의 시작이 될지는 이제부터의 행보에 달려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