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집힌 판단
2023년 12월 28일, 경기도 안산의 한 주점에서 19세 아르바이트생 채단비 씨가 40대 업주 A 씨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는 신고가 접수됐습니다. 경찰은 이듬해 2월, 증거가 부족하다며 A 씨를 불송치 처분했습니다. 하지만 채 씨는 그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의신청서를 남기고 사흘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경찰의 판단은 피해자의 죽음 이후 뒤집혔습니다. 수원지방검찰청 안산지청(공소청)은 보완수사에 착수해 A 씨를 준강간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습니다.
경찰은 왜 무혐의로 결론 내렸나
경찰은 주점 내부 CCTV 영상에서 채 씨가 업주와 대화하며 웃는 모습, 껴안는 장면 등을 근거로 채 씨가 항거불능 상태가 아니었다고 판단했습니다. 단 한 차례의 대면조사만 진행한 뒤, 피의자에게만 CCTV를 제공받고 피해자의 스마트폰 포렌식은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경찰은 "CCTV 영상이 명확해 추가 조사가 필요 없었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채 씨의 혈중알코올농도는 면허 취소 수준이었고, 병원 기록에는 통증을 호소해 항생제를 처방받은 사실이 남아 있었지만, 경찰은 이를 결정적 증거로 삼지 않았습니다.
보완수사가 찾아낸 것들
공소청은 사건을 넘겨받아 A 씨 주거지 압수수색, CCTV 원본 재분석, 휴대전화 포렌식, 참고인 조사, 의료 자문 등을 진행했습니다. 재분석 결과, A 씨가 몸을 가누지 못하는 채 씨를 부축해 CCTV 사각지대로 데려가는 장면이 확인됐습니다.
혈액·소변 감정과 전문의 자문을 통해 채 씨가 약물과 알코올로 인해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없는 상태였음이 입증됐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이성적 호감이 없었다는 휴대전화 기록도 확보됐습니다. 검찰은 "범행 전후 사정과 객관적 증거를 토대로 경찰의 불송치 결정과 달리 준강간 혐의가 입증됐다"고 밝혔습니다.
사건이 알려지자 시민단체는 8,200명 이상의 기소 촉구 서류를 제출했고, 유족은 피해자의 실명을 공개하며 명예 회복을 요구했습니다. 김남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국정감사에서 사건을 제기하며 '전건송치' 제도 도입을 촉구했습니다.
이번 사건은 초동수사의 부실과 성인지 감수성 부재가 어떤 비극을 낳는지 보여줍니다. 검사의 직접 보완수사 기능이 폐지된 이후, 경찰의 1차 수사 책임이 커진 만큼 독립적인 수정 메커니즘 마련이 과제로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