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전산망 마비 초래한 국정자원 화재, 원인과 과제
지난 9월 26일 오후, 국가정보자원관리원(국정자원)에서 발생한 화재는 정부의 핵심 전산망을 마비시키며 전국적인 혼란을 야기했습니다. 이 사고로 600여 개에 달하는 정부 시스템이 멈춰 섰고, 복구에 한 달 이상 소요될 전망입니다. 화재는 무정전전원장치(UPS)에 사용되던 노후 리튬이온 배터리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사건의 정확한 원인과 재발 방지 대책 마련이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습니다.
노후화된 UPS 배터리와 화재 위험
이번 화재의 발화 지점으로 지목된 것은 2014년 설치된 LG에너지솔루션의 UPS용 리튬이온 배터리입니다. 이 배터리는 이미 권장 사용 연한인 10년을 1년 이상 초과한 상태였습니다. UPS는 정전 시 전력 공급을 유지하는 필수 장치로, 휴대폰 보조 배터리와 유사한 리튬이온 배터리를 사용합니다. 리튬이온 배터리는 높은 에너지 밀도로 효율이 좋지만, 내부 양극과 음극이 분리막 손상으로 접촉할 경우 '열 폭주' 현상을 일으켜 화재 위험이 높습니다.
전문가들은 배터리 노후화가 화재의 주요 원인일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오래된 배터리에는 리튬 결정이 쌓여 분리막을 손상시키고 단락(쇼트)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실제 국정자원 측은 지난해 6월, LG CNS로부터 배터리 교체 시기가 도래했다는 권고를 받았으나, 정기 검사에서 '정상' 판정을 받았다는 이유로 사용을 계속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처럼 사용 연한을 넘긴 노후 장비에 대한 관리 소홀이 대규모 사고로 이어진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고 있습니다.
작업 과정에서의 과실 가능성도 제기
배터리 노후화 외에도 화재 당시 진행된 작업 과정에서의 과실 가능성도 높게 제기되고 있습니다. 화재는 배터리 교체 또는 시스템 이격을 위한 이동 작업 중 발생했으며, 이 과정에서 전원 차단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UPS는 직류 전원을 사용하므로, 전원이 연결된 상태에서 케이블을 분리하면 전압 상승으로 인한 스파크 발생 위험이 커집니다.
실제 119 신고 녹취록에 따르면, 화재 발생 5분 뒤 최초 신고자는 “못 꺼요”라고 답하며 진압의 어려움을 토로했습니다. 또한, 작업자 1명이 화상을 입은 점은 배터리가 거의 완충 상태였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일반적으로 배터리 이동 시에는 사전 방전을 통해 잔여 에너지를 낮춰야 하지만, 이러한 안전 수칙이 지켜지지 않았을 경우 화재 위험은 더욱 커집니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전원 차단 상태에서의 결함 발화 또는 작업 중 절차 미준수로 인한 아크 발생 가능성을 중심으로 합동 감식을 진행 중입니다.
안전 관리 시스템의 허점
이번 사고는 정부의 전산망 안전 관리 시스템 전반에 대한 문제점을 드러냈습니다. 행정안전부가 지난해 발표한 연구보고서에서도 배터리 화재 대비 방화 격벽 설치, 가스 소화 시스템 구축 등 다양한 대비책을 제안했지만, 대전센터에서는 이러한 조치가 미흡했던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배터리와 서버 간 간격이 좁고, 가스 소화 시스템 대신 물을 사용해야 하는 상황이 진압을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정부의 시스템 이중화 및 백업센터 구축 계획이 더디게 진행된 점도 비판받고 있습니다. 예산 부족을 이유로 백업센터 가동이 지연되거나, 공주센터 건립이 11년 만에 완료되는 등 안일한 대처가 사고 피해를 키웠다는 지적입니다. 이는 과거 카카오 데이터센터 화재 등 유사 사고를 통해 얻은 교훈이 현장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배터리 포비아' 확산과 ESS 시장의 미래
국정자원 화재는 '배터리 포비아'를 다시 확산시킬 수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습니다. 배터리 업계는 이번 사고가 배터리 자체의 결함보다는 관리 부실에 따른 결과라는 입장이지만, 연이은 화재 발생으로 안전성에 대한 불안감은 커지고 있습니다. 특히, 재생에너지 확대의 핵심 축인 에너지 저장 시스템(ESS) 시장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전망입니다.
현재 리튬이온 배터리를 대체할 현실적인 대안이 부족한 상황에서, 업계와 전문가들은 안전 관리 강화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리튬인산철(LFP) 배터리의 경쟁력 강화, 액침냉각 기술 도입, 그리고 나트륨 이온 배터리 등 차세대 기술 개발에 대한 투자가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배터리 도입부터 폐기까지 전 과정에 걸친 범정부 차원의 종합적인 안전 관리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