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갯빛과 기도가 교차한 토요일
6월 13일 오후 서울 도심은 뜨거웠습니다. 기온이 30도에 육박하는 무더위 속에서도 을지로와 종로 일대에는 사람들로 가득 찼는데요. 한쪽에서는 무지개 깃발을 든 이들이 행진했고, 불과 800m 떨어진 시청 앞에서는 찬송가와 기도가 울려 퍼졌습니다. 바로 제27회 서울퀴어퍼레이드와 이에 맞선 보수 기독교 단체 '거룩한방파제'의 통합 국민 대회가 같은 날, 같은 도심에서 열린 겁니다.
퀴어퍼레이드 주최 측은 올해 슬로건을 '교집합: 다름을 연결로'로 정하고 참가자들의 다양한 정체성을 환대하는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현장에는 주최 추산 약 5만 명이 모였고, 프랑스·호주·벨기에 등 15개국 대사관과 불교·개신교·가톨릭 등 다양한 종교 단체, 그리고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와 군인권센터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부스를 세우며 연대의 뜻을 보였습니다. 방송인 홍석천도 SNS에 무지개 깃발 사진을 올리며 참여를 인증했죠.
반대편에서는 전통적 가정과 창조질서를 지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거룩한방파제 측은 '남녀의 결혼, 건강한 대한민국'을 주제로 집회를 열었고, 참석 인원을 30만 명이라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서울시 도시 데이터를 보면 시청 일대 최대 집결 인원은 1만 6천 명 수준이었습니다. 이들은 차별금지법과 동성결혼, 낙태 허용 등에 강력히 반대하며 퀴어 문화 축제의 즉각 중단을 촉구했습니다.
"다름을 연결로" vs "창조질서 수호"
퀴어퍼레이드 현장에서는 단순한 축제를 넘어 법제화 요구가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참가자들은 종각역에서 을지로입구역까지 행진하며 차별금지법 제정과 동성혼 합법화, 생활동반자법 마련을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학교 현장에서 성소수자 청소년의 73%가 차별을 겪는다는 조사 결과가 인용되며, 안전한 일상이 보장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컸습니다.
이에 맞서 거룩한방파제 측은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동성애에 대한 비판을 억압하고 역차별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이들은 차별금지법이 가정과 교육 현장의 성경적 가치를 해치고, 표현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탈동성애자를 자처하는 연사는 하나님 안에서 찾은 자유를 간증하며 동성애 회복 가능성을 강조했고, 참가자들은 마치 자녀를 꾸짖는 부모의 마음으로 성소수자를 반대한다고 표현했습니다.
양측의 메시지는 극명하게 엇갈렸습니다. 퀴어축제 측은 '사랑에 정해진 모양은 없다'며 혐오에 손하트로 답했고, 반대 집회 측은 '동성애는 죄'라는 피켓을 들고 거리를 행진했습니다. 다행히 양측 사이에 물리적 충돌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서로를 보는 시선의 온도 차는 뚜렷했습니다.
충돌 없었지만 남은 과제
올해 행사에서 가장 눈에 띈 장면 중 하나는 국가인권위원회의 공식 불참이었습니다. 안창호 위원장이 취임한 이후 인권위는 2년 연째 퀴어축제에 공식 부스를 세우지 않았는데요. 위원장이 반대 집회 측에도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축제 주최 측이 반발하면서 생긴 결과입니다. 이에 불만을 터뜨린 인권위 직원들은 '앨라이 모임'을 따로 꾸려 부스를 운영했고, 사회적 약자와의 연대가 국가기관의 상징적 역할이라며 위원장의 소극적 태도를 비판했습니다.
사실 이번 집회는 2000년 50명의 작은 행진으로 시작한 퀴어퍼레이드가 26년 만에 5만 명 규모로 성장한 변화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기도 했습니다. 외국 대사관과 종교 단체, 대학 동아리까지 참여하는 모습은 성소수자 인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확대되고 있음을 방증합니다. 하지만 반대 집회에 20대와 30대가 33%로 가장 많이 참여한 점은 세대와 이념을 넘어 가치관 대립이 심화되고 있음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향후 포괄적 차별금지법이나 생활동반자법, 동성혼 관련 논의가 본격화될수록 서울 도심의 이 토요일 풍경은 정치적 쟁점으로 더욱 부상할 가능성이 큽니다. 이날 도심의 무지개와 찬송가는 같은 공간에 공존했지만, 서로 다른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