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올레를 설립해 전국에 걷기 여행 문화를 뿌리내린 서명숙 이사장이 7일 68세의 나이로 별세했습니다. 2007년 첫 발을 내디딘 제주올레는 현재 27개 코스, 총 437km에 이르는 길로 성장했고, 1300만 명 이상이 그 길을 걸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단순한 한 인물의 부고를 넘어, 우리 사회에 깊은 치유와 연결을 선사한 한 운동의 정수를 돌아보게 합니다.
산티아고에서 제주까지, 걷기라는 영감
서명숙 이사장의 이야기는 2006년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시작됩니다. 기자 생활로 지친 그는 그 길에서 걷기의 소중함을 깨달았고, 고향 제주도에도 ‘살아서 갈 수 있는 천국’ 같은 길을 만들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언론인에서 사회적 기업가로의 변신이었죠. 2007년 사단법인 제주올레를 설립하고 서귀포 시흥리에 첫 코스를 열었을 때만 해도 이 길이 이 정도로 커질지는 상상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그는 어린 시절 해안가를 누비던 추억과, 시국사건으로 인한 옥살이 같은 인생의 굴곡까지 모두 길에 녹여냈습니다. 산티아고에서 얻은 영감은 제주의 옛길과 마을을 잇는 현실로 탄생했고, ‘놀멍 쉬멍 걸으멍’이라는 슬로건은 속도 중심 사회에 ‘느림’의 가치를 일깨웠습니다.
마을을 살리고 문화를 바꾼 437km
제주올레의 확장은 단순한 도보로 개척을 넘어 사회경제적 변화를 몰고 왔습니다. 길이 생기면서 외부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이는 공동체 카페나 민박 같은 소규모 마을 사업을 촉발했습니다. 제주연구원 분석에 따르면 올레길은 매년 약 1조 2000억 원의 생산 유발 효과를 창출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더 큰 영향은 문화적 파급력이었습니다. 2010년대 전국을 휩쓴 도보 여행 열풍의 시발점이 되었고, ‘올레’라는 제주 방언이 전국민의 일상어로 자리 잡게 했습니다. 단순한 관광 인프라가 아니라 지역 경제의 활력소이자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안하는 플랫폼으로 자리매김한 거죠. 해외 진출도 이뤄져 2012년 일본 규슈에 올레길이 수출되며 한국형 걷기 문화의 국제적 가능성도 보여주었습니다.
남긴 길과 계속되는 발걸음
서 이사장은 생의 마지막까지 길과 걷음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올해 2월, 20년 만에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난 친구 잔느 캐서린 헤니와 제주에서 재회했습니다. 헤니는 올레길을 걸으며 그의 업적을 ‘인간의 길’을 만든 것이라고 치켜세웠습니다. 서 이사장은 별세 직전 안은주 제주올레 대표에게 “20년을 건강하게 산 건 열심히 걸었기 때문”이라며 “올레길에서 행복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의 공로는 2017년 국민훈장 동백장 수상으로 공식 인정받았지만, 진정한 유산은 수치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가 남긴 가장 큰 선물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속도로 땀을 흘리며 마주한 풍경과 사람, 그리고 그 속에서 찾은 작은 위로일 것입니다. 27개의 코스는 완성됐지만, 그 길 위를 수많은 사람이 걷고 있고, 그들의 발걸음이 서 이사장이 꿈꾼 ‘치유의 길’을 계속해서 확장해 나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