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의 시작, 국민연금의 뜻
국민연금이 고려아연 최윤범 회장의 사내이사 재선임 안건에 대해 의결권을 행사하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본격적인 경영권 분쟁의 불이 붙었습니다. 지분율 5.20%를 가진 국민연금의 이 '미행사' 결정은 단순한 중립을 넘어 각 진영이 완전히 다른 해석을 내놓으며 대립을 격화시키고 있는데요. 고려아연 현 경영진은 이를 미국 제련소 구축 등 미래 사업의 중요성을 인정한 '전략적 판단'으로 평가합니다. 반면, MBK파트너스를 앞세운 영풍 측은 오히려 현 경영진에 대한 불신의 표시라고 주장하며 의사결정 구조의 전면적인 재검토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국민연금의 한 번의 결정이 양측의 주장에 완전히 상반된 근거를 제공해버린 겁니다.
노조의 우려와 MBK의 그림자
이번 사태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것은 고려아연 노동조합입니다. 노조는 MBK파트너스를 '약탈적 투기자본'으로 규정하며 강력히 반발하는데, 그 배경에는 홈플러스의 사례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MBK가 홈플러스를 인수한 후 약 3,500명의 인원을 감축하고 19개 점포를 폐쇄한 전력이 있기 때문이죠. 노조는 "고려아연은 홈플러스가 아니다"라고 강조하며, 국가 기간산업인 아연 제련의 특수성과 44년 연속 흑자라는 경영 성과가 외면당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더 큰 문제는 고용 불안입니다. 고려아연은 38년 연속 무분규로 임금 협약을 맺어온 안정적인 노사 관계의 모델인데, 경영권 변경이 이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위기감이 노조의 반발을 더욱 거세게 만들고 있습니다.
국가 기간산업과 자본의 충돌
이번 분쟁은 단순한 주주 간의 이익 다툼을 넘어 국가 차원의 논의로 비화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고려아연은 아연이라는 핵심 소재를 공급하는 기업으로, 그 공급망의 안정성은 국가 산업과 안보에 직결된다는 평가를 받고 있죠. 따라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단순한 수익률 추구의 문제가 아니라 공적 자금을 운용하는 기관의 사회적 책임이 어디까지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노조는 "국민연금은 누구를 위한 연금인가"라고 질문하며, 장기적인 국가 경제의 밑바탕을 이루는 기간산업을 지키는 것도 국민연금의 중요한 역할이라 주장합니다. 24일로 예정된 주주총회는 각자의 입장이 충돌하는 결정의 장이 될 텐데, 그 결과는 고용 안정, 산업 경쟁력, 그리고 주주 가치라는 여러 가치 사이에서 한국 기업 지배구조의 방향성을 가르는 중요한 사례가 될 전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