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수구에서 드러난 피싱의 실체
부산의 한 원룸 배수구에서 깨진 유심 조각이 무더기로 발견되면서 해외 보이스피싱 조직의 윤곽이 드러났습니다. 경찰은 이를 단서로 해외 전화를 국내 ‘010’ 번호로 바꾸는 불법 중계기를 추적했고, 부산과 경남의 원룸과 빌라 13곳에 설치된 장비를 확인했습니다. 해외에서 걸려온 전화가 국내 번호처럼 표시되는 구조였던 겁니다.
수사 결과 조직은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9월까지 중계기 400여 대와 유심 5,200여 개를 활용했습니다. 경찰은 조직원 101명을 검거해 16명을 구속했고, 대포폰 121대와 라우터 848대도 압수했습니다. 피해자는 19명, 피해액은 약 15억 원으로 파악됐습니다. 피해자들은 검찰을 사칭한 ‘010’ 전화를 믿고 금융정보를 넘긴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010 번호가 만든 신뢰의 착시
중계기의 핵심은 번호 변작입니다. 국내 유심을 장비에 꽂으면 해외 인터넷전화가 ‘010’ 번호로 표시돼 피해자에게는 평범한 국내 통화처럼 보입니다. 번호 하나가 사기 전화에 신뢰를 더해준 셈입니다. 조직은 타인 명의의 저가 유심을 대량 확보하고 텔레그램의 러시아어 구인 게시판으로 운영자를 모집했습니다.
운영자들은 러시아어권 외국인이었고, 유학생이나 관광비자 체류자, 불법체류자도 포함됐습니다. 이들은 원룸에 장비를 두고 관리하는 대가로 주당 60만에서 70만 원을 가상자산으로 받은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국내에서는 84명이 유심을 제공한 혐의로 입건됐는데, 6만에서 12만 원을 받거나 대출 조건으로 명의 유심을 넘긴 사례도 있었습니다.
남은 과제는 유통망 차단
이번 사건은 피싱 조직이 장비 공급과 국내 유통, 현장 운영을 분리해 역할을 나눈 점을 보여줍니다. 중국 국적 총책이 장비를 공급하고 러시아 국적 인원이 유통을 맡는 등 조직은 여러 층으로 구성됐습니다. 경찰은 해외 총책과 밀수 경로를 추적하고 있습니다. 정부도 통신사와 협력해 중계기 사용을 차단하고 ‘010’ 피싱 예방 캠페인을 벌이겠다고 밝혔습니다.
다만 번호 표시만으로 상대를 신뢰하기는 어려운 만큼, 수사기관이나 금융회사를 사칭해 송금과 현금 전달을 요구하면 일단 통화를 끊고 공식 연락처로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합니다. 제도적 차단과 이용자 확인 습관이 함께 갖춰져야 피해를 줄일 수 있다는 지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