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령 근거 없이 흘러간 13억 원
감사원이 대법원을 상대로 실시한 정기감사에서 상당한 규모의 예산 부적정 집행이 드러났습니다.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은 대법관과 법원행정처장에게 법령 근거 없이 정기적으로 지급된 현금 격려금인데요. 2022년부터 지난해 9월까지 약 4년간 지급된 금액은 총 12억 9,900만 원에 달합니다.
이 돈은 대법관들이 매월 별도로 받는 512만 원의 특정업무경비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지급이었습니다. 2022년부터 2024년 4월까지는 대법관 1인당 매달 평균 200만 원이 현금으로 전달되었고, 법원행정처장은 같은 기간 매달 300만 원을 받았습니다. 이후 2024년 5월부터는 100만 원에서 400만 원 사이로 차등 지급하는 방식으로 바꿨지만, 감사원은 이 역시 사실상 정기 지급이라고 봤습니다.
문제는 대법원 예산 집행지침이 법령 근거 없는 정기적 격려금을 명시적으로 금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더욱이 현금으로 집행하다 보니 증빙 자료가 거의 없어 해당 돈이 적정하게 쓰였는지조차 확인이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방식의 지급은 지난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특수활동비 논란 이후에도 유사한 관행이 이어진 것 아니냐는 지적을 낳고 있습니다.
창고에 쌓인 컴퓨터와 불분명한 영수증
격려금 문제만큼이나 예산 운영의 허술함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법원행정처는 2022년부터 2025년까지 약 260억 원을 들여 전산장비를 대량 구매했는데, 정작 필요 이상으로 많이 사둔 탓에 PC 6,131대와 프린터 2,983대, 스캐너 559대가 창고에 쌓여 있었습니다. 이는 전체 법원 정원의 약 3분의 1이 사용할 수 있는 물량으로, 예산 소진을 위해 구매량을 늘린 정황까지 포착되었습니다.
업무추진비 관리도 상당히 미흡했는데요. 2022년부터 지난해 8월까지 와인 구매에 1억 892만 원을 사용하면서도 구체적인 집행 목적이나 대상, 장소 등을 제대로 적지 않은 경우가 많았습니다. 심야 시간대나 주말, 공휴일에 집행한 금액이 9,950만 원에 달했고, 건당 50만 원이 넘는 지출에서 증빙 서류를 누락한 사례도 다수 확인되었습니다.
이밖에도 이미 계약에 포함되어 있던 윈도우 운영체제 업그레이드를 별도 과업으로 추가해 6억 5,000만 원을 중복 지급한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부동산 경매사건 집행관 여비를 규정보다 많이 지급해 국민의 집행비용 부담을 키운 점도 지적받았습니다.
오래된 관행의 끝과 남은 과제
법원행정처는 해당 격려금이 소부나 전원합의체 재판에 관여한 대법관과 재판연구관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명했습니다. 또한 법원행정처장에 대해서는 사법행정 총괄과 대외 업무 부담을 고려한 조치였다고 밝혔는데요. 이 지급 관행은 조희대 대법원장 취임 이전인 2022년부터 이어진 것으로 확인되어, 특정 대법원장 체제에서만 발생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감사원은 노경필 법원행정처장에게 정기적 격려금 지급이 재발하지 않도록 주의 조치를 내렸습니다. 이에 법원행정처는 감사 결과를 수용한다는 입장을 내놓았고, 지난 7월부터는 실적과 업무 부담 정도에 따라 격려금을 차등 지급하는 개선안을 시행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감사가 드러낸 것은 단순히 돈의 흐름만이 아닙니다. 헌법기관으로서 국민 세금을 관리해야 할 대법원 행정부가 오랜 관행을 이유로 예산 규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앞으로 법원행정처가 말로만 투명성을 약속할 것이 아니라, 집행 절차와 증빙 관리를 어떻게 실질적으로 바꿀지에 대한 후속 조치가 주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