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총력전을 선포한 날
이재명 대통령이 직접 주재한 ‘AI 시대의 K-반도체 비전과 육성전략 보고회’에서 정부는 2047년까지 반도체 분야에 700조 원 이상을 투자해 글로벌 반도벨트에서 ‘세계 2강’으로 도약하겠다는 야심찬 목표를 공식 선언했습니다. 이번 전략은 단순한 투자 계획을 넘어, AI 패권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한 국가 차원의 총력전에 가깝습니다. 보고회에는 전영현 삼성전자 부회장, 곽노정 SK하이닉스 대표 등 주요 업체 수뇌부가 대거 참석해 민관 협력의 의지를 함께 했습니다. 글로벌 반도체 시장이 미국의 원천 기술, 대만의 파운드리, 한국의 메모리로 ‘1강-2중’ 구도를 이루고 있는 현재, 한국이 확고한 2강으로 발돋움하겠다는 의지로 읽힙니다.
정부가 제시한 구체적인 목표는 네 가지 축으로 압축됩니다. 2047년까지 세계 최대 규모의 반도체 클러스터를 조성하고 생산 팹(공장) 10기를 신설하는 것, AI 특화 반도체와 HBM 이후 차세대 메모리 기술에서 초격차를 유지하는 것, 시스템 반도체 생태계를 강화하기 위해 팹리스 산업 규모를 10배 확대하는 것, 그리고 광주·부산·구미를 잇는 ‘남부권 반도체 혁신벨트’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산업통상자원부 김정관 장관은 “반도체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며 적극적인 지원 의지를 재확인했습니다.
투자 장벽을 허무는 제도적 뒷받침
이 같은 막대한 투자를 실행하기 위해 정부는 기존의 제도적 장벽을 해소하는 방안을 내놓았습니다. 가장 주목받은 것은 ‘금산분리’ 원칙의 유연한 적용입니다. 이 대통령은 보고회에서 “금산분리 원칙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첨단산업 투자 자금 조달 대책 마련이 거의 완료됐다”고 밝혔습니다. 독점 방지를 위한 기존 원칙이 대규모 투자가 필수적인 첨단 산업 성장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입니다. 구체적으로 증손 회사의 지분 보유 한도를 완화하고 금융 리스 보유를 허용하는 방안이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또한 150조 원 규모의 ‘국민성장펀드’를 반도체 및 AI 분야에 집중 투자하는 ‘K엔비디아’ 모델을 구체화하고, 약 2조 원 규모의 ‘반도체 산업 특별회계’를 신설해 안정적인 재원을 마련할 계획입니다. 반도체협회는 이번 전략을 환영하며 “기업의 노력만으로 대응하기 어려운 구조적 변화에 대한 국가 차원의 종합 대응 전략”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기업 현장의 목소리가 반영된 것으로 보입니다.
지역 균형 발전, 그리고 숨은 핵심 과제
이번 전략의 또 다른 축은 ‘탈수도권’입니다. 이 대통령은 반도체 기업들에게 재생에너지가 풍부한 남쪽 지역에 대한 투자를 적극 검토해 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지역 균형 발전을 위해 ‘지산지소(地産地消)’ 원칙에 따라 발전소 인근의 전기요금을 낮추는 ‘송전거리 비례요금제’ 도입과 기업에 토지수용권을 부여하는 방안까지 검토 중입니다. 광주는 첨단패키징 실증센터를 핵심으로 한 국가대표 패키징 거점으로, 부산은 전력반도체, 구미는 소재·부품 특화단지로 육성해 남부권 혁신벨트를 완성한다는 계획입니다.
그러나 화려한 청사진 뒤에는 넘어야 할 산도 있습니다. 가장 큰 도전 과제는 ‘전력’입니다. AI 반도체는 기존 제품보다 훨씬 많은 전력을 소비하는데, 현재 국내 전력 수급은 이미 팽팽한 상황입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용인에 계획한 첨단 팹 10기 건설 비용이 당초 예상보다 5배 뛴 600조 원에 달하는 이유도 설비 복잡도 증가와 더불어 전력 관련 비용이 큰 몫을 차지하기 때문으로 분석됩니다. 업계에서는 주 52시간제 예외 적용 등 인력 수급 해소 방안과 함께 안정적인 전력 확보가 성공의 관건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생태계 구축, 그리고 미래를 위한 투자
궁극적인 목표는 메모리 강국의 위상을 넘어 시스템 반도체 생태계를 완성하는 것입니다. 정부는 민관 합동으로 4조 5천억 원 규모의 12인치 ‘상생 파운드리’를 구축해 국내 팹리스 기업에 전용 물량을 공급하고 시제품 제작을 지원할 계획입니다. 또한 ‘반도체 소부장 글로벌 No.1 프로젝트’를 통해 소재·부품·장비 분야를 집중 지원하고, 국내 최초의 ‘반도체 대학원대학’ 설립을 통해 연간 300명의 석박사급 고급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전영현 삼성전자 부회장은 “AI 시대 반도체 성공의 핵심은 ‘연결과 협력’”이라며 정부의 지원에 감사를 표했습니다. 그는 삼성도 평택캠퍼스에서 국내 소부장 협력사와의 상생 협력을 확대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번 대규모 투자 전략이 단순한 시설 확장을 넘어, 연구 개발(R&D)에서 인재 양성, 지역 균형 발전에 이르기까지 한국 반도체 산업의 근본 체력을 다지는 종합 프로젝트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가 최대 관건입니다. 글로벌 경쟁이 하루가 다르게 치열해지는 가운데, 한국이 AI 시대의 새로운 반도체 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장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