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무즈 해협 봉쇄 가능성이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자, 중동 주요 산유국들이 한국의 석유 비축기지 활용을 놓고 정부에 협의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등을 비롯한 국가들이 해협 밖에 원유를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대안으로 한국의 인프라에 주목하면서, 에너지 안보를 둘러싼 국제적 협력의 새로운 장이 열리고 있습니다.
해협 봉쇄에 선제 대응하는 산유국들
이번 움직임의 직접적 계기는 중동 지역의 지정학적 불안정성입니다. 호르무즈 해협은 전 세계 원유 수송의 약 20%가 통과하는 전략적 요충지인데요, 최근 전쟁 장기화로 인해 이 해협이 봉쇄되거나 통행이 제한될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산유국 입장에서는 자국의 주 수출로가 막힐 경우 엄청난 경제적 타격이 예상되기 때문에, 리스크를 분산시키기 위한 선제적 조치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한국 산업통상부 관계자에 따르면, 이들 국가는 원유를 한국의 서산 비축기지 등에 미리 보관해두고, 필요할 때 현지에서 판매하는 방안을 구체적으로 논의 중이라고 합니다. 이는 단순한 보관 협력을 넘어, 공급망 리스크를 공동으로 관리하려는 전략적 협력으로 해석됩니다.
한국 정부도 이러한 요청을 에너지 안보 강화의 기회로 보고 있습니다. 이미 정부는 사우디, UAE, 미국 등 17개국으로부터 약 1억 1천8백만 배럴의 대체 원유 물량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는데요, 산유국들의 비축기지 활용 관심이 대체 물량 확보 협상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결국 양측 모두 해협 봉쇄라는 같은 위협에 직면했고, 한국의 견실한 비축 인프라가 위기 대응을 위한 최적의 플랫폼으로 부상한 겁니다.
국내 산업 안정화를 위한 긴급 조치
산유국들의 움직임과 맞물려, 국내 산업 현장에서는 원료 수급 불안이 현실화되고 있습니다. 특히 석유화학산업의 핵심 원료인 나프타의 해외 수급에 어려움이 예상되자, 정부는 이번 주부터 '긴급 수급조정'에 돌입했습니다. 주요 내용은 나프타 분해 시설(NCC)의 가동률을 현재의 55% 수준에서 70%까지 끌어올려 에틸렌, 프로필렌 등 기초유분의 생산을 확대하는 것입니다. NCC 가동률 상승은 PE, PP 등 주요 석유화학 제품의 수급 안정에 직접적으로 기여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 조치는 국제 유가 불안과 맞물려 더욱 절실합니다. 두바이유와 WTI 원유 가격이 각각 35%, 46% 가량 상승하는 등 원자재 수입 환경이 악화되고 있는데요, 정부는 나프타 수급 가격을 지원하기 위한 예산을 충분히 확보하고, 대체 수입 시 발생하는 단가 상승분의 절반을 보조하는 추가경정예산도 마련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은 호르무즈 해협을 우회하는 대체 항로를 통한 원유 확보(4월 4600만 배럴, 5월 7200만 배럴) 노력과 함께, 국내 산업의 생산 라인을 안정시키기 위한 다각적인 방어선을 구축하는 의미를 가집니다.
상호호혜적 협력의 장기적 전망
중동 산유국과 한국의 이번 협력 구상은 단순한 일시적인 거래를 넘어서는 의미를 지닙니다. 한국은 산유국들로부터의 안정적인 원유 접근성을 확보하고, 국제 에너지 협력에서의 위상을 높일 수 있습니다. 특히, 국내 비축기지(현재 1억4천만 배럴 수용 가능)에 외국 원유를 보관하는 '국제공동비축' 모델이 본격화되면, 한국은 동북아의 에너지 허브로서의 역할을 강화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됩니다. 정부는 이미 비축 능력을 2000만 배럴 추가로 확충하기 위한 예산을 반영했으며, 해외 비축기지 활용을 포함한 협력 범위를 단계적으로 넓혀갈 방침입니다.
반면, 중동 산유국들에게는 한국의 첨단 비축 시설이 원유의 안전한 보관과 유동적 관리를 가능하게 하는 전략적 자산입니다. 위기 시 빠르게 시장에 공급할 수 있는 유동성을 확보함으로써 수출 리스크를 헤지할 수 있죠. 이러한 협력은 양측이 가진 자원(원유)과 인프라(비축기지)를 상호 보완하여, 불확실성이 증대된 글로벌 에너지 시장에서 함께 위험을 관리해 나가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분간 국제 정세의 불안요소가 해소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인 만큼, 이번에 형성된 협력 체계는 중장기적으로 더욱 공고해질 가능성이 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