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호황 이면에 감춰진 경제 격차
AI 반도체 수요 폭증으로 한국과 대만이 역대 최고의 경제 지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시가총액 1조 달러를 돌파했고, 대만 역시 올해 1분기 15%에 육박하는 성장률을 보였는데요. 하지만 이런 호황의 혜택은 소수 기업과 계층에만 집중되며 경제 전반의 균열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반도체를 제외한 전통 제조업은 어려운 상황입니다. 석유화학과 철강, 배터리와 자동차 부품 업계는 중국과의 경쟁 심화와 수요 둔화로 부진을 겪고 있고, 근로자들은 물가 상승 속에서 실질임금 정체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전체 지표는 좋게 보이지만 실제로 매우 제한된 분야만 성장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자산 시장의 쏠림 현상도 심각합니다. 올해 개인투자자의 코스피 순매수액 중 약 83%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집중될 정도로 자금이 편중되었는데요. 고령층은 퇴직연금을 해지해 반도체 주식에 투자하고, 청년층 사이에서는 주식 수익이 연봉을 대체할 수 있다는 인식까지 확산되고 있습니다. 대만 중앙은행은 부유층과 저소득층의 격차가 극명해질 위험을 경고했고, 삼성전자 노조의 성과급 쟁점 파업은 AI 시대 분배 갈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HBM 집중이 낳은 레거시 공급난
첨단 반도체 생산에 모든 역량을 쏟아붓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역설이 발생했습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HBM 등 고부가 제품에 집중하면서 단종 직전의 구형 D램 공급이 급감했는데요. 이로 인해 2003년 출시된 DDR2 가격이 최근 분기에 55~60%나 폭등하는 이례적인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문제는 단순한 웨이퍼 부족이 아닙니다. TSV와 CoWoS 등 첨단 패키징 공정의 병목 현상으로 후공정이 막히자, 전방 수요가 레거시 시장으로 밀려나는 풍선효과가 발생한 겁니다. DDR2는 대만의 윈본드와 ESMT 단 두 곳에서만 생산되고 있어 공급 공백을 메울 대안이 사실상 없는 실정입니다.
산업용 자동화 장비와 자동차 인포테인먼트, 가전 제조사들은 부품 조달난에 성능 저하를 감수하고 구형 규격으로 설계를 변경하는 우회책을 쓰고 있습니다. 특히 장기 공급 계약이 없는 중소 부품 협력사들은 원가 부담이 치명적으로 작용해 경영 위기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사이클 정점 논란과 풀어야 할 과제
현재의 구형 메모리 가격 폭등이 단순한 일시적 현상이 아닐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습니다. 과거 20172018년과 2021년 사례를 보면 레거시 칩 가격 급등 이후 23분기 뒤 주력 D램의 평균판매단가가 정점을 찍고 하락했는데요. 이런 패턴을 고려할 때 이번 DDR2 폭등은 메모리 투자 사이클의 말기 진입 신호로 읽힐 수 있습니다.
물론 CoWoS 증설 속도와 북미 하이퍼스케일러들의 설비투자 가이던스에 따라 상황은 유동적입니다. 다만 패키징 라인 증설에는 최소 2~4분기의 시차가 소요되는 만큼, 단기간 내에 병목 현상이 해소되기는 어려운 구조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정부와 반도체협회는 대만 유통망 핫라인 개설과 레거시 칩 대체 설계 마이그레이션 비용 지원 방안을 추진 중입니다. AI 반도체가 이끄는 성장이 지속되려면 첨단 기술 못지않게 전반 산업의 동반 성장과 이익 분배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뒤따라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