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의 순간, 뒤집힌 역사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우리들의 밥상'에 걸린 붓글씨를 보고 한 노인이 무릎을 꿇었다. 독립운동가 박원근 지사의 아들 박용현 씨는 76년 만에 찾은 아버지의 흔적에 오열하며 절을 했는데요. 이 장면은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렸고, 언론과 SNS에서 감동적인 순간으로 확산됐습니다.
하지만 닷새도 채 안 돼 상황이 뒤집혔습니다. 전시된 글씨가 애국지사의 것이 아니라, 대표적인 친일파로 꼽히는 박중양의 작품일 가능성이 제기된 겁니다. 박물관은 조용히 작품을 철수했고, 박 씨와 유족들은 큰 당혹감에 휩싸였습니다.
동명이인이 낳은 혼란
문제의 발단은 이름이었습니다. 친일반민족행위자인 박중양은 개명 전 '박원근'이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독립운동가 박원근 지사와 한자까지 같은 동명이인이었던 것으로 파악됐는데요. 전시된 작품 '일반시국은'은 2019년 미술품 경매에서 박원근 지사의 유품으로 출품된 이력이 있었고, 박물관은 이를 근거로 별다른 교차 검증 없이 전시를 진행했습니다.
당연히 박물관의 검증 절차가 너무 허술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글씨 모습이나 도장, 서명 등 기본적인 사전 확인 없이 소장가의 진술과 경매 기록만 믿었기 때문인데요. 유홍준 관장은 공식 사과문을 내고 유족과 국민에게 고개를 숙였으며, 현재 외부 전문가를 통해 필적 감정 등 정밀 검증을 진행 중입니다.
국가기관의 무게
이번 사태는 단순한 실수를 넘어선 문제입니다. 광복절을 불과 이틀 앞둔 시점에, 국가가 관리하는 박물관에서 독립운동가와 친일파를 구분하지 못한 것은 상징적 충격이 큽니다. 특히 유품 한 점 없이 아버지를 기억하던 후손에게 허상을 보여준 뒤 다시 상처를 입힌 점은 매우 안타까운 대목입니다.
사실 박원근 지사의 친필이 현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진위 여부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박물관이 앞으로 보여야 할 태도는 명확합니다. 철저한 검증과 투명한 공개를 통해 유사한 혼란이 반복되지 않도록 제도를 다듬어야 한다는 점인데요. 광복절을 맞아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 그 시작은 정확한 사실 확인에서부터 이뤄져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