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학적 경쟁의 새로운 전선
미국이 주도하는 새로운 경제안보 동맹인 ‘팍스 실리카(Pax Silica)’가 공식 출범했습니다. 지난 12일 워싱턴DC에서 열린 첫 서밋에는 한국, 일본, 영국, 싱가포르 등 8개국이 참여했고, 한국 측에서는 김진아 외교부 제2차관이 수석대표로 참석했습니다. 이 동맹의 목표는 인공지능(AI)과 반도체 등 첨단산업의 핵심 공급망을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들끼리 협력해 구축하고, 과잉생산이나 덤핑과 같은 비시장적 관행에 공동으로 대응하는 것입니다. 특정 국가를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글로벌 공급망에서 영향력을 키워가는 중국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뚜렷합니다.
‘팍스 실리카’라는 이름 자체가 상징적입니다. 고대 로마의 ‘팍스 로마나(Romana, 로마의 평화)’나 미국 주도의 ‘팍스 아메리카(Americana)’를 연상시키는 이 용어는, 첨단 기술 공급망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질서를 미국이 동맹국과 함께 이끌어가겠다는 포부를 담고 있죠. 미국 국무부는 이를 “안전하고 혁신적인 실리콘 공급망 구축을 위한 전략적 구상”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협력의 구체적 그림
이번 서밋에서 채택된 ‘팍스 실리카 선언’은 상당히 구체적입니다. 협력 범위는 소프트웨어, 데이터 인프라부터 반도체의 설계·제조·패키징, 그리고 희토류 등 핵심 광물의 정제와 공급에 이르기까지 폭넓습니다. 핵심은 각 참여국이 가진 산업적 강점을 연결해 상호 의존적이면서도 회복력 있는 생태계를 만드는 거죠. 예를 들어, 한국은 선언문에서도 명시된 대로 배터리, 반도체, 에너지 분야에서의 역량을 바탕으로 공급망 안정에 기여하겠다는 입장입니다.
김진아 차관은 회의에서 “글로벌 회복력 강화를 위한 국가 간 협력이 필요하다”며 한국의 적극적인 참여 의지를 밝혔습니다. 또한, 이 협의체가 참여국 기업들에게 실질적으로 우호적인 환경을 조성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향후에는 세부 분야별 실무그룹을 구성해 공동 투자, 연구 개발, 인력 교류 등 구체적인 협력 과제를 발굴해 나갈 예정입니다.
배경에 깔린 중국 견제 구도
이러한 움직임의 배경에는 중국에 대한 깊은 우려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중국은 희토류 등 전략적 광물의 생산과 수출을 통제하며 공급망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고, AI 분야에서도 빠르게 성장하며 기술적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모습을 보여왔습니다. 미국은 이런 ‘강압적 의존’에서 벗어나고, 혁신과 공정 경쟁을 저해하는 관행으로부터 민간 투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미국의 움직임은 단순한 협의체 구성에 그치지 않습니다. 최근 미 연방하원은 2026 회계연도 국방수권법안을 통과시키며, 대통령에게 중국의 AI 및 군사 관련 첨단 기술 산업에 대한 미국의 투자를 제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조항을 포함시켰습니다. 이는 중국의 기술 발전에 미국 자본이 활용되는 것을 막으려는 구조적인 차단 장치로 읽힙니다. ‘팍스 실리카’는 이런 광범위한 경제안보 전략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셈입니다.
향후 전망과 남은 과제
‘팍스 실리카’의 출범은 글로벌 기술 공급망이 더 이상 순수한 경제 논리만으로 움직이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국가 안보와 지정학적 경쟁이 공급망 재편의 주요 동력으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미국 중심의 새로운 블록이 형성되는 이 과정에서 한국을 비롯한 참여국들은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동시에 긴장 관계를 관리해야 하는 미묘한 줄타기를 해야 합니다.
한국으로서는 반도체, 배터리 등 강점 분야에서의 입지를 활용해 협의체 내 영향력을 키울 기회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최대 교역국인 중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계할지도 동시에 고민해야 할 과제죠. ‘팍스 실리카’가 배타적인 블록이 아닌, 개방적이고 규칙 기반의 협력 플랫폼으로 발전할지, 아니면 새로운 경제적 분열의 씨앗이 될지는 앞으로의 구체적인 실행 여하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