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태에 항모가 사라진 날
미 핵추진 항공모함 조지 워싱턴함이 중동 지역에 도착해 본격적인 작전을 시작했습니다. 일본 요코스카항을 떠나 싱가포르를 거쳐 아라비아해에 진입한 이 전단은 기존에 해당 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에이브러햄 링컨함과 임무를 교대했습니다. 이번 이동으로 인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는 미군 항공모함이 한 척도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현재 아태 지역의 항모 공백은 2000년대 들어 세 번째로 나타난 현상입니다. 9·11 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 전쟁 때와 2024년 가자지구 분쟁 당시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인데요. 12척의 함선과 75대의 전투기 및 군용기를 보유한 워싱턴함 전단은 비상 상황 발생 시 미 본토 전력보다 평균 17일 빠르게 작전 지역에 도달할 수 있던 핵심 전력이었습니다. 이 공백은 단순한 전력 재배치를 넘어 지정학적 의미를 갖습니다.
장기 파병 끝에 드러난 전력 한계
임무를 마치고 귀항한 에이브러햄 링컨함은 지난해 11월 21일 출항 이후 약 272일 동안 해상에 머물렀습니다. 당초 계획보다 파병 기간이 크게 길어지면서 승조원의 투신 시도와 같은 복무 환경 문제가 불거지기도 했습니다. 장기간 해상 체류가 승조원들에게 미친 부정적인 영향은 미 해군의 전력 운용 체계에 내재된 한계를 보여주는 단면입니다.
현재 미국의 다른 항모들도 대부분 정비나 훈련에 들어간 상태입니다. USS 시어도어 루즈벨트, USS 칼 빈슨, USS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함 등 3척은 당장 투입이 어려운 상황이고, 이란 전쟁의 장기화와 노후 함선 수리 지연으로 연말까지 새로운 전력 배치가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사실 미국이 동시에 여러 지역에 항모 전단을 유지하는 능력은 과거에 비해 상당한 제약을 받고 있습니다.
동맹 신뢰를 흔드는 전력 공백
이번 항모 공백은 단순한 군사적 빈자리를 넘어 동맹국들의 불안감을 키우고 있습니다. 중국은 스카버러 암초에서 군사 훈련을 벌이는 등 해양 영유권 분쟁 지역에서의 도발을 이어가고 있는데요. 핵심 전력이 빠진 아태 지역에서 중국과 북한의 군사적 움직임에 대한 우려는 동북아는 물론 동남아 국가들까지 확산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한미연합훈련 대폭 축소 지시까지 겹치면서 인도태평양 동맹에 대한 미국의 안보 공약이 약화되는 것이 아니냐는 시각이 제기됩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이러한 전력 공백이 미국이 신뢰할 수 없는 동맹이라는 인식을 강화하고 전 세계적으로 미국의 안보 이행 능력에 대한 의문을 품게 할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중국은 이를 계기로 주변국에 미국 방어에 의존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적극적으로 확산시키고 있습니다.
이란 전쟁이라는 중동의 불씨와 아태 지역의 전력 공백이 맞물리면서 미국은 동맹 관리와 전략적 억제 사이에서 어려운 균형을 잡아야 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